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우디오 아바도 (문단 편집) === 90년대 === *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선출''' 1989년 베를린 필의 수장으로 있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직책을 사임하고 몇 달 후에 세상을 뜨자, 그해 10월 8일 베를린 필은 민주적인 투표 방식에 의한 상임 지휘자 선출을 도입해 아바도를 상임 지휘자로 뽑았다. 투표에 앞서 단원들 간의 오랜 의견 교환이 있었으며, 투표 당일에도 하루 종일에 걸친 난상 토론 끝에 어느 정도 의견의 합의를 본 후 투표를 실시했다고 한다. 베를린 필의 차기 지휘자로 거론된 인물은 여럿 있지만 [[다니엘 바렌보임]], [[로린 마젤]], [[리카르도 무티]], [[오자와 세이지]]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었다. 막판에는 바렌보임과 마젤의 양자 대결로 압축되었는데, 양 후보를 지지하는 단원들 간의 대립이 워낙 첨예해서 바렌보임이나 마젤이 될 경우 퇴단하겠다고 선언하는 단원들이 상당수 있을 정도였다. 바렌보임과 마젤에 대한 단원들의 호불호가 너무 강해서 도저히 타협점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제3안으로 뜬금없이 아바도가 거론되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아바도와 베를린 필과 브람스 교향곡 3번을 공연했는데, 이때 리허설에서 아바도의 민주적인 지휘 방식이 단원들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아바도 본인도 이것이 자신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대립각을 세우던 단원들은 결국 아바도로 타협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아바도를 선택한 베를린 필의 결정에 대해서는 세계 언론은 물론 아바도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당시 성음 라이센스 음반으로 클래식을 접하던 국내음악애호가들에게도 아바도의 지명은 [[충공깽]]이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DG, DECCA, Philips 세 음반사를 보유하고 있던 폴리도어와 라이센스계약을 맺었던 성음음반은 카라얀, 뵘, 번스타인, 솔티, 쿠벨릭 등 네임밸류있는 지휘자 중심으로 음반을 발매했다. 그래서 이들과 레퍼토리가 중복되던 아바도의 음반은 라이센스로 잘 발매되지 않았다. 또한 일본에서 발매된 음반추천서적이 몇년이나 지나서야 번역되어 들어오던 터라 국내 애호가들에게 아바도는 잘 거론되지 않던 지휘자였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내한하여 국내 음악계에 큰 센세이션과 충격을 일으켰던 것이 이로부터 불과 5년 전이었음을 상기하자.] 뜬금없는 아바도의 선출은 세계는 물론 아바도와 베를린 필 당사자들에게도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베를린 필의 콘서트마스터 다니엘 스타브라바도 아바도의 선출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아바도 본인도 베를린 필의 직책은 예상 못했다고 하면서 바로 수락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물론 누구나 예상했던 것처럼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직책을 거절하지 않고 수락했다. 한편 카라얀 사후 역시 공석이 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운영권도 사실상 장악했다. 카라얀 사망 직후 [[게오르그 솔티]]가 카라얀의 대타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지휘하게 되면서 한때 솔티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후임이 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솔티는 얼마 후 페스티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은 카라얀 사망 직후 카라얀 미망인 엘리오테가 아바도에게 접근하여 밀약을 맺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아바도가 곧바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한동안 솔티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것은, 당시 아바도가 시카고 심포니, 뉴욕 필 등의 차기 지휘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느라 무척 바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아바도가 처음에 솔티를 밀어줬던 것은 당시 아바도가 가장 원하고 있었던 시카고 심포니 상임 자리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솔티는 자신이 숱한 트러블을 겪고 물러났던 [[파리 오케스트라]]의 후임이 된 바렌보임이 예상과 달리 15년 가량 장기집권하면 파리 오케스트라를 무탈하게 이끄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에 솔티는 시카고 상임 자리를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물려주었다. 베를린 필에 취임한 아바도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소홀히 했던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렸고, 문학과 음악의 결합을 꾀하는 여러 기획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악단의 활동상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현대음악을 중시하는 시도는 베를린 청중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베를린 언론은 아무도 연주하지 않는 곡을 연주한다고 해서 그것을 높이 평가할 수 없다는 논평을 냈다. 이는 자주 연주되는 전통적인 레퍼토리와 승부해서 인정받아야 하는데 아바도가 그것을 피하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아바도가 현대음악을 자주 지휘하며 베를린 시민들로부터 외면받는 동안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을 자주 객원 지휘하면서 베토벤, 브루크너, 바그너 등의 정통 독일 고전 낭만주의 음악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청중들과 평단으로 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문학과 접목하여 레퍼토리를 구성하려는 소위 "문화운동"을 시도했다. 거창한 구호와는 달리 단지 같은 소재를 취했을 뿐 음악적으로 완전히 동떨어진 작품을 함께 선곡하여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예를 들어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과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동시에 레퍼토리로 올리는 식이었는데, 두 곡의 소재는 같지만 음악적 지향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를 한 연주회에서 연주하는 것은 그다지 공감을 얻지 못했다. 아바도의 이런 문화운동에 대해 '디 차이트'지는 "세련된 밀라노의 교양인인 아바도가 야만적인 베를린 청중들을 얼마나 개화시켰나?"하고 비아냥거렸다. 취임 공연인 말러 교향곡 제1번이 큰 히트를 쳤지만[* 큰 히트라는 말도 부족한,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공연으로 회자된다.] 이후에 발매된 음반들은 그만큼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93년 베를린 필과의 두번째 말러 녹음인 제5번 교향곡이 큰 기대 속에 발매되었다. DG사가 새로 개발한 4D 방식의 녹음이라는 점을 앞세우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이 음반은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녹음한 당해에 편집을 끝내고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유례없이 논쟁적인 리뷰들을 양산했다.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은 연주였지만, 문제는 말러 교향곡 제1번의 큰 성공으로 음악 애호가들이 기대가 너무 높아졌던 데 있다. 결국 아바도의 새 말러 5번은 번스타인과 빈 필의 음반과 비교당하며 난도질 당하고 말았다. 이어 발매된 빈 필과의 말러 교향곡 제2번 역시 아바도 자신의 이전 녹음만 못한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녹음들은 리뷰어들에게 이전처럼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DG도 아바도 음반의 마케팅을 크게 줄여서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과 같은 대작이 소리소문 없이 발매되기도 했다.[* 90년대 후반부터 때마침 음반계의 불황이 닥쳐 메이저 음반사들은 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음반 판매 실적이 좋지 않자 DG와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994년에는 소니와 계약을 맺고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모차르트 교향곡 등을 녹음했으나 그다지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는 동안 본진이었던 DG와는 관계는 악화되었다. 80년대 지휘자 왕국이었던 DG는 간판 아티스트였던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차례로 타계했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소니 클래식스로 이적], [[다니엘 바렌보임]][* 텔덱으로 이적], [[오자와 세이지]][* 필립스로 이적]가 타사로 이적하면서 아바도는 제임스 레바인과 함께 DG의 간판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DG는 아바도라고 해서 다른 소속 아티스트와 다른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DG는 필립스로 이적한 오자와를 대신해서 아시아 시장과 프랑스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신예 [[정명훈(지휘자)|정명훈]]을 영입해서 키우고 있었는데 정명훈에게도 아바도와 같은 개런티를 지급한 것이 아바도의 심기를 크게 거슬렀다.[* 당시 DG 입장에서 아시아는 유럽, 미국과 더불어 3대 시장이었고, 특히 세계 2위인 일본 시장과 7위 한국 시장에서의 매출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정명훈은 프랑스가 [[프랑스 대혁명]] 200주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야심차게 창단한 바스티유 오페라의 초대 음악감독이었다. DG가 정명훈을 영입한 것은 아시아 시장과 더불어 프랑스 시장을 노리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1997년 아바도는 DG와 완전히 결별을 선언하고 EMI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EMI에서 발매된 음반은 베를린 필의 음향을 잘 살리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았고, 결국 몇 개월 후에 DG로 조용히 다시 돌아왔다. * '''관계 악화와 재계약 포기''' 1991년 빈 필 및 빈 국립 가극장과 여러 갈등 끝에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먼저 1991년 빈 필 신년음악회에서는 빈 왈츠와 폴카만을 레퍼토리로 하던 악단의 전통을 깨고 로시니, 모차르트, 슈베르트, 비제 등의 작품을 대거 선곡하면서 큰 파장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91년 이후 아바도는 더이상 빈 필의 신년음악회에 초대되지 못했다.[* 물론 슈트라우스 가문 이외의 다른 작곡가들의 춤곡이나 폴카, 행진곡을 한두곡 끼워 넣는 경우는 과거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그런 경우도 대부분 빈 왈츠, 폴카의 전통 하에 있는 곡들이 선곡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당해년에 기념할 만한 위대한 작곡가에 대해서는 빈 왈츠 전통과 무관하더라도 연주하는 관습도 있었다. 하지만 아바도는 그렇게 한두곡 집어 넣는 전통을 깨고 로시니, 모차르트, 슈베르트, 비제 등 빈 왈츠와 무관한 작곡가들의 레퍼토리를 여러 곡 선곡했는데, 이것은 빈 신년음악회의 전통을 완전히 흔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억지로 레퍼토리로 넣기 위해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2곡을 오케스트라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하기도 했다.] 또 빈 국립오페라의 이사진과도 갈등이 생겨 1991년에는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에서도 물러났다. 아바도와 빈 필과의 관계는 베를린 필에 선임되기 이전부터 미리 잡혀있던 공연과 녹음 계획을 다 소화한 이후에는 거의 단절되고 말았고 아바도가 죽을 때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보통 트러블이 생기더라도 수년 내지 10년 정도 지난 후에는 관계가 회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카라얀이 빈 국립 가극장을 사임한 후 13년만에 복귀한 것,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서 낙선한 마젤과 레바인이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며 베를린 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나 수년 후 복귀한 것,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빈 필 정기연주회 리허설 중 자리를 박차고 나와 잠적한 후 4년 후 복귀한 것 등 여러 예가 있다.] 아바도처럼 죽을 때까지 관계가 끊긴 것은 이례적이었다. 게다가 음반 판매고가 급감하며 베를린 필과도 갈등을 빚게 되었다. 카라얀 시절에 베를린 필 단원들은 음반, 영상물 취입 및 카라얀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본봉의 다섯배 가량의 부수입을 올렸다. 카라얀 시절 1년에 평균 25개 정도 발매되던 음반은 아바도 시절 연 3회 정도로 급감했다. 수입이 급감하자 여러 단원들이 베를린 필을 퇴단하여 교수나 솔로이스트로 전향했다. 특히 1992년~1993년에는 관악기 수석들이 대거 퇴단하여 싹 물갈이 되었다.[* 로타어 코흐, 게르트 자이페르트, 칼 하인츠 쵤러 등이 동시에 퇴단했다. 하지만 이들 중 자이페르트와 쵤러는 베를린 필 하모닉의 단원 정년 퇴직 시기인 60대 중반이 되어 퇴단 한 것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베를린 필에서 오랫동안 콘서트마스터를 맡아온 미셀 슈발베도 66세의 나이에 베를린 필을 떠났다.] 평론가들 뿐만아니라 단원들도 베를린 필의 중후한 음색을 희석시키는 아바도의 해석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리허설에서 아바도가 금관악기와 팀파니 소리를 줄이라고 지시하면 단원들은 악보에는 포르테시모로 써있다고 항변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베를린 필의 콘서트마스터를 역임한 다니엘 스타브라바는 이탈리아식의 밝고 가벼운 해석을 추구했던 아바도의 해석에 다수의 단원들이 동의하지 않았고 이때문에 알려진 바와 같이 음악적으로 자주 부딪혔다고 술회했다. 베를린 필 금관단원들도 훗날 인터뷰에서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 시절 강렬한 금관사운드를 추구했던 베를린 필의 전통을 아바도가 evil, enemy로 치부하고 완전히 부정했던 일종의 암흑기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당시 리허설 중에 단원들과 고성이 오갔다는 소문들이 밖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아바도의 민주적이고 탈권위주의적인 리허설 방식은 처음에는 단원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단원들은 이러한 방식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바도는 종종 스스로 템포를 결정하지 못하고 리허설에서 여러 템포로 시도해 본 후 단원들에게 어떤게 좋을지 물어보곤 했는데, 이런 방식은 오히려 단원들의 불만을 유발했다. 지휘자 본인이 스스로 템포를 결정하지 못하는 태도는 단원들의 신뢰감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리허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에 단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1997년에 이르러서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1997년 12월 20일자 '프랑크푸트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 기사는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리허설 장면을 폭로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연습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하냐고 아바도에게 따지는 단원, 아바도의 리허설 와중에 잡담과 토론하는 단원, 리허설 시간에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편지를 쓰는 단원 등의 모습을 공개한 기사가 나오자 아바도의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면서 베를린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얼마 후, 설상가상으로 베를린 필 측이 아바도의 임기가 끝나는 2002년 이후에 더이상 재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흘러 나왔다. 이전까지 베를린 필의 모든 상임지휘자는 거의 임기가 종신이었기 때문에 베를린 필이 아바도와 더 이상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이 보도는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보도가 나간지 불과 며칠 후인 1998년 2월 13일, 아바도는 두번째 임기가 끝나는 2002년 자진해서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